일본이 미국의 페리제독에 무력으로 개항을 당한것과 똑같이 일본도 함대를 이끌고와서 강화도 앞에서 무력 시위를 통해 조선을 개항시킨다.

조선의 국제법을 따르는 첫 조약인 조일수호조약이 탄생한다.(일명 강화도 조약)
글의 제목에서와 같이 조선은 보이는것에 초점을 맞춘다.
예를 들어 조약의 결정권자가 조선은 조선국왕전하 이고 일본은 천황폐하 라고 적혀있는것을 지적한다. (조선 앞에 대 자가 왜 빠졌는지를 지적한다.)

이런 명분적인것을 제외하고 조선이 요구한 것과 일본이 요구한 것을 비교해서 알아보자.

조선은 일본에게 아편 무기 천주교를 금지한다는 내용을 포함시킨다.
아편은 청나라와의 무역적자를 매꾸고자 영국이 불법적으로 청나라에 유통시킨 그 아편을 말한다.
청나라가 아편으로 사회적으로 엄청난 혼란에 휩싸이는것을 보고 조선은 사회 체재의 안정을 위해서 아편의 수입을 금한것 이다.
무기도 이런 생각이랑 같이 보면 된다. 조선은 세종 이후에 사병이 금지되고 있었다. 이는 국가의 지배체제를 흔드는 사람이 나오지 못하게 하는데 중점이 되어 있었다.
만약에 일본에서 서양의 무기가 들어오고 그 무기가 중앙정부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에게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반란이 일어나고 중앙군은 서양 무기로 무장한 반란군 진압에 힘이 들 것이다.
무기의 수입을 금한것도 아편과 마찬가지로 지배체제의 안정을 위해서 택한 것이다.
천주교도 위 2개와 동일하게 봐야 한다. 조선은 계급사회인데 모든 사람의 평등을 주장하는 종교가 들어오면 사회를 혼란하게 만드는건 당연하니 금지한 것이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지배층은 자신들의 이익과 안정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조선은 체제의 안정을 위해 위 3개를 금지하는것을 요구하면서 경재적인 것은 모두다 뺏기게 된다.

조일수호조약에서는 조선과 일본과의 무관세무역이 인정되고 일본인의 치외법권도 인정된다. 일본 화폐가 사용가능해지고 일본인의 토지 임차가 가능해진다.

조선은 우리가 보명 어의가 없는 조약을 일본과 맺게 된 것일까?
조선에는 외국과 조약을 채결한 경험도 없었고 조약에 대해 아는 관료도 없었다. 어찌보면 이런 조약이 나올수 밖에 없는 환경이였다. (일본도 미국과 맺은 미일수호조약도 위와 같은 형태이다. 다만 일본은 제국주의로 강대국이 된 이후 서양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다시 채결한다.)
조선이 일본과 위와 같은 불평등 조약이 채결되고 이후 모든 서구 열강과 불평등조약이 채결되게 된다.

재미있는건 일본도 당시에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조선에 팔게 없었지만 영국 제품으로 중개무역으로 돈을 벌었다는 사실

도시는 무엇일까?
고대의 도시는 정치의 중심지 였다.
중세의 도시는 고대의 도시에서 좀더 발전되서 자유로운 노동시장이 존재하는 공간이였다.
근대는 자본가와 하층민과의 갈등이 일어나는 공간이다. 또한 사람들의 욕망이 나타나는 곳이였다.

현대에는 도시에 사는 사람의 비율이 높을수록 선진국이라고 보기도 한다.

현대의 도시에도 정치의 중심지, 자유로운 노동시장, 상층민과 하층민간의 계급 갈등, 인간의 욕망 이 모든 것이 다 있는데 좋은 것일까?

나도 잘 모르겠다. =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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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여름날
우리는 네덜란드 하면 튤립, 풍차, 히딩크를 생각하지만 이보다 더 많은 것이 나타내는 나라.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을 보여주는 나라가 네덜란드다.
네덜란드는 국토의 25%가 해수면보다 낮은 나라다.
자연은 네덜란드에게 척박한 환경을 주었고 그들은 그 환경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들의 환경을 개척해 왔다.
그들은 모든 국가의 배들이 장착하던 대포를 빼고 화물을 날랐다.
또한 발트해의 패권을 가진 덴마크가 배의 갑판의 넓이로 세금을 징수하자 과감하게 갑판의 넓이를 줄이고 화물을 실을 수 있는 창고를 늘렸다.
그들은 동남아시아의 시장을 놓고 네덜란드 회사들끼리 싸우자 과감하게 회사를 합친다.
마약의 중독성이 심각해지자 그들은 중독성이 조금 낮은 대마를 합법화 해버린다.
위 4개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나는 생각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개방되어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럼 네덜란드인들은 어디서 이런 개방성 가지게 되었을까?
우리는 중세 이후에 유럽의 교통 결점에 생기던 도시를 살펴봐야 한다.

도시는 중세 유럽을 지배하던 봉건제의 장원과 상반되는 공동체로 농업보다는 상업을 위주로 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봉건영주에게 값을 지불하고 개인의 자유와 도시의 자치권을 사왔었다. 네덜란드의 플랑드르은 북해 상업의 주요 거점이었다.
네덜란드에는 강력한 왕권이 존재하지 않았고 외국이 네덜란드의 통치권을 가지고 있었다.(프랑스의 유력한 영주인 브루고뉴 공작의 통치에 있었으며 이후 합스부르크가의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하지만 통치자들은 자기들의 영지에 관심이 있었고 네덜란드는 각 영주들이 관리했으며 영주들은 좀더 자유로운 환경을 만들어 더 많은 유럽의 부와 자유민들을 끌어 모았다.
각 유럽에서 천대받고 차별당한 유대인들이 이곳에 많이들 모여들었다. 이들이 네덜란드로 가져온 자본은 네덜란드가 강대국으로 나아가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후 내용에는 교제인 대국굴기 네덜란드편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네덜란드는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끼여 있으며 풍요로운 어장을 가지고 있는 북해를 끼고 있다.
네덜란드인은 북해에서 나오는 청어잡이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단순히 청어를 많이 잡는 것 그치지 않고 네덜란드의 청어의 품질을 관리하고 브랜드화 하였다. (대국굴기에서는 한 어부가 청어의 내장을 한꺼번에 제거하는 기술을 발견을 설명하면서 이야기 진행해나가고 있다.)

청어 이후에는 농업을 들고 있다. 네덜란드는 타 지역에서 많이 생산하는 농산물 대신 이윤이 높은 원예농업, 낙농업에 집중하면서 많은 부를 축적하게 된다.

네덜란드는 청어잡이로 확보한 부와 축적된 항해 기술을 토대로 북해와 발트해의 중계무역에 나서게 된다. 그들은 특유의 사고의 유연성으로 상업을 극대화 할 수 있었습니다.
북해와 스페인과의 중개무역을 하던 네덜란드인들은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으로 네덜란드 무역의 최대 시장인 스페인을 잃게 됩니다. 네덜란드는 북해와 스페인의 중개무역에서 벗어나 전세계로 배를 돌리게 됩니다.

네덜란드가 배를 전세계로 돌릴 때 네덜란드인은 동인도회사라는 것을 만들게 됩니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세계최초의 주식회사라고도 합니다.)
동인도회사는 네덜란드 국민들과 국가에 투자를 받아 자금을 조달하였고 몇 년 후에는 투자자들에게 투자한 금액대비 배당금을 지불하였습니다. (이는 현재 주식회사의 배당과 유사합니다.)
또한 암스테르담에는 현재의 주식거래소과 같은 기능을 하는 주식거래소가 있었습니다. 주식거래소가 생김으로써 개인들끼리 거래를 하던 동인도회사의 주식은 좀더 많이 그리고 좀더 안정적으로 거래되기 시작합니다.
동인도회사가 전세계에서 무역으로 벌어온 부가 네덜란드로 들어오자 화폐가 갑자기 많아지고 한동안 화폐의 위기가 오는듯했습니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시중에 넘쳐나는 돈을 은행이라는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효과적으로 관리하게 됩니다.

네덜란드는 이후에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 국고를 낭비하면서 싸웠지만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하고 2류 국가로 몰락하게 됩니다.

PS. 세계의 문화지리 과제 제출용으로 쓴 글을 복습 차원에서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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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여름날
외국에 대해 개항을 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조금식 나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문제는 개항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권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소수에 불가하다는 것이였다.

이후 개항파 쇄국파는 위정척사론와 통상론으로 다신 나누어지게 된다.

위정척사론은 소중화 의식을 강조하였다.

천주교는 제사를 안지내고 조상에 대한 예의가 없으니 짐승가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조선의 문을 열어주면 우리것이 더 더러워진다. 그러므로 교류는 필요없고 교류를 주장하는 자들도 조선의 문화를 더럽게 만들려는 자들이다.(이 논리에는 유교를 지키는 한국과 중국은 문명국이며 비 유교권인 서구는 문명국이 아니다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통상론자들은 외국의 무역거래로 조선은 풍족해 질수 있는데 지배층은 지배구조가 흔들릴것을 걱정해서 통상을 안하니 결국에는 조선은 힘없고 가난한 국가가 될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폈다.(위 논리는 요즘들어 자유무역이 모든 나라에게 이익을 준다는 애기와 조금 비슷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이후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3일만에 청나라에 의해 실패하는등의 일을 겪게된다. 이 이야기는 아직 진도가 안나가서 이만 끝낸다.

우리가 프랑스, 미국가 싸우고 있을떄 일본의 동향을 이야기해보자

우선 일본은 실권은 없는 천황이 있었으며 실권을 가지고 있는 막부가 있으면 각 지방에는 지방정부가 있었다.
일본은 미국 페리제독의 함대에 의해 개항을 하고 지방정부와 막부간의 개항이냐 쇄국이냐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내전의 과정은 중요한게 아니지만 내전에서 승리한 지방정부와 천황은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다지면서 조선을 노리게 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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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여름날
이전 내용을 먼저 복습하고 이후 내용을 정리해 보자.
우선 중세는 장원중심의 사회였다.
장원은 농노가 자신의 노동력을 영주에게 줌으로써 영주에게서 토지의 임대권과 안전을 보장받는 일종의 공동체였다.
중세 장원이 발전시킨 주요한 이유는 사회혼란과 자주일어나는 전쟁이다.
일반 농민들은 혼란한 시대에 안전을 위해서 스스로 영주에게 들어간것이다.

영주와 또다른 중세의 지배계층 교회
교회는 넓게 퍼진 기독교를 이용해서 유럽의 1/3 ~1/2에 다다르는 토지를 소유하였다.
교회는 농민들에게 혼란한 세상에 마음의 안식을 주었고 농민들은 보답으로 십일조와 세금을 내었다.

중세는 부의 생산수단은 토지였다. 중세에는 사람들의 수요가 많이 있지 않아 상업이 발전하지 않았다. 필요한 대부분의 물품은 본인이 직접 만들었고 다른 사람이 만드는게 필요한 것은 본인의 생산물과 물품 교환을 하였다.

11세기경에 일어난 십자군 전쟁으로 동방의 물품이 서방으로 들어오면서 귀족들의 수요가 조금식 증가하기 시작한다.

십자군 원정 이후에 동방과의 교류를 위한 도시들이 이탈리아 북부에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베니치아, 제네바등이 지중해 무역을 위해 발전한 도시들이다.
유럽 북부에도 무역을 위한 도시들이 발전하기 시작한다. 현재 네덜란드 지방인 플랑드르의 부르헤와 북독일의 몇개의 도시들이 북해 일대의 상업과 함께 발전한다.

북해의 부르헤등과 북이탈리아의 베니치아 제노바와 만나는 중간지점인 프랑스 상퍄뉴지방에 정기시가 열리게된다.
상업의 발전과 함께 성장한 도시들은 영주에게 돈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하나씩 사다가 마지막에는 도시에 대한 모든 권리를 받아 중세의 영주등에 영향을 받지 않는 새로운 공동체가 만들어 지게된다.

도시가 발전하게된 이유중 가장 중요한것은 자본의 발전이라고 뽑을수 있다.
중세에는 부의 생산수단은 토지가 유일했다. 자본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쓸데도 없었고 쓸 욕심도 없었다. 하지만 십자군원정이후 영주등의 소비가 증가하였고 상업이 발전하면서 자본을 쓸수 있는곳이 증가하게된다.

자본이 자본을 부르는 사회가 장원등 이전 중세의 공동체를 서서히 파괴했다고 볼수 있다.

쓸 내용이 많지만 귀찬아서 오늘은 이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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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여름날
조선의 외교정책은 사대교린으로 모든 것이 설명된다.
사대 큰것을 섬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중국 본토를 말한다. 명나라와 청나라를 말한다.
교린 동등하게 사귄다. 여진과 일본은 동등하게 사귄다는 말이다. 여진과 일본에게 한 외교정책을 교린보다는 당근과채찍이라고 표현하는게 더 좋을수도 있다고 생각이 든다.
세종때 여진의 근거지인 함경도를 공격하여 4군 6진을 개척하였고 이후 여진과 교류를 하였다.
세종 초기에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를 공격하였고 이후 왜관을 설치하여 일본과 일정한 교류를 하였다.

사대교린과 더불어 조선은 폐쇄외교를 펼치였고 사회또한 농업중심이였다. 이것에 대해 많은 의견이 있는데 내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것은 조선지배층의 양반 중심의 사회유지를 위해서 위 정책을 썼다는 내용이다.

조선은 초기에 지금 생각하는것보다 유교적인 색채가 적은 나라였다.
조선 초기에는 딸과 아들이 동등하게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았으며 여자의 권익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안정화되어있던 조선의 지배 체제가 무너지게 되자 지배 계층들은 성리학을 통해 조선을 더욱 폐쇄적인 사회로 만들어버린다.

임진왜란 이후로 명나라는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잃어버리고 이떄를 틈타 흩어져있던 여진족이 통일을 이루고 후금이라는 강력한 통일국가를 이루게 된다.

후금은 이후 청나라로 국명을 바꾸고 조선을 침공하여 인조의 항복을 받는다.(이후 군신의예를 칭하게됨)

명나라가 청나라에 의해 멸망한 이후 조선에서는 효종을 중심으로 청나라를 정복하자는 북벌운동이 일어나지만 실제 정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왕권을 강화하는데 이용되었다.

위 북벌론과 다르게 멸망한 명나라를 이어 중화가 돠자는 중화론도 대두되었다.
소중화론(중화인 명나라가 없어졌으니 조선이 작은 중화가 되어야 한다는 이론) 확산되고 중국문화와 한국의 문화가 합쳐진 관우묘등이 건설되기도 하였고 멸망한 명나라의 연호도 계속 사용하였다.

(송시열 : 주선 후기 성리학자로 주자학에 엄청난 권위를 가져서 송자라고 불리였다. 노론의 수장으로 산림을 토대로 조정을 장악하였었다.) 

이후 대원군이 정권을 잡게될때 까지 몇개의 유력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가 유지된다.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왕권은 강화되고 세도정치는 조금 사라졌지만 아직 권력의 독점 현상은 어느정도 유지된다. 대원군은 강화된 왕권을 강조하기위해 화재로 유실된 경복궁을 복원하는 사업을 진행하는데 이에 없청난 재정이 들어가고 조선 각지에 너무 많은 화폐가 퍼져서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나타나기도 한다.

대원군이 몇가지의 불공평하 조세제도를 수정하기도 했고 농민들에게 고리대금과 같은 일을 했던 환곡제를 손보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대원군 또한 지배계층이기 때문에 이전 권력층들이 했던거와 같은 지배체재를 확고히 하기 위한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한다.

문을 열지 않는 조선에 대한 서구열강들의 압박과 공격은 더욱 심해진다.
프랑스가 선교사들을 이용해 천주교를 조선에 들어오게한다. 대원군이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계속하자 프랑스는 군대를 이끌고 강화도로 쳐들어간다. 이때의 싸움을 병인양요하고 한다.

서구열강들은 신민지화 하려는 국가에게 종교를 먼저 퍼트린다. 그 이후 그들과 교역을 하고자 한다. 이때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점은 서구열강들은 산업혁명을 통해 산업을 발전시켜왔고 그들의 대표적인 수출품은 2차 가공품들이다. 그에비해 교역을 강요받는 국가들의 대부분은 농업사회 또는 가내수공업 등 산업의 발전이 미비한 국가들이였다.
이 두 국가가 정당한 조건에서 교역을하면 어디가 이길지는 딱 보이는 것 아닐까?

위 내용은 우리가 잘 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의 논점과 많이 비슷해 보인다.
내가 신자유주의를 신제국주의라 부르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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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여름날
 
카우보이 비밥 - 천국의 문
감독 와타나베 신이치로 (2001 / 일본)
출연 야마데라 코이치, 이소베 츠토무, 코바야시 아이, 이시즈카 운쇼
상세보기
카우보이 비밥 레전드급인 일본 애니메이션
TV시청판은 DVD로 집에 모셔두고 있지만 천국의 문을 못봐서 하나로TV로 늦었지만 봤다.

역시 스파이크는 짱 멋지다. (;ㅂ;)b

카우보이비밥은 말보다 노래다.

감상평은 닥추!!!!

카우보이 비밥 오프닝곡 <TANK>




카우보이 비밥 마지막 엔딩곡<B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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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여름날

중세 장원은 경재 정치의 공동체였다

영주는 농노들에게 토지와 안전을 보장하고 농노는 영주에게 토지에 나오는 수확물과 일정 노역을 부담했다.
기도하는자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전에 중세는 어떤 세계인지 간단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5세기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서유럽에서는 많은 게르만 부족들의 영도 쟁탈전이 일어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불안에서 살아야 했다 그래서 수많은 농민들은 영주, 기사(싸우는자)들에게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주면 자신의 노동력을 받치게 된것이다. 이떄 현실이 불안하자 구원을 전파하는 기독교가 강세를 펼치게 되었다.
농민들은 교회를 다님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었으며 이후 죽어서 구원을 받을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세금 형식의 십일조와 수많은 재산을 헌납했다.

중세는 경재적 생산수단이 토지밖에 없는 사회였다. 이떄 토지를 소유했던 영주,  토지에서 직접적인 노동을한 농노, 그리고 영주들 만큼의 토지를 소유한 교회, 중세의 축을 농노 영주 교회로 보는 이유이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안식을 주면서 그 대신 십일조를 받았다. 또한 중세 영주들은 교회의 권위에 기대였다. 그래서 영주 또는 왕이 새 영토를 정복했을때 땅의 일부를 교회에 기부하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교회의 토지는 유럽의 1/3에서 1/2에 다달았다고 한다.

중세시기는 자급자족의 경제 체재였다. 2000명 ~ 3000명의 인구밖에 되지 않는 장원에서 왠만한 소비품은 본인들이 많들었고 일부 교환을 할 품목또한 소량이였다.

11세기말에 일어난 십자군 전쟁은 봉건제가 중심이 되었던 중세를 흔들게 된다.
수많은 기사들이 예루살램으로 원정을 떠날떄 그들에게 필요한 물품등을 대는 상인들이 돈을 벌었다. 그리고 기사들이 동방에서 사지고온 물품들은 기존 장원에서 있던 영주들의 소비를 증진시키게 되었다. 이후 들어난 영주들의 소비에 맞추려는 상공업의 발전이 뒤따라오게 된다.

역시 말로 정리하는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워=_=;; 압뒤가 뒤죽박죽되어버린 정리지만 어쩃듯 완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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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여름날
직접적인 근현대화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근대와 전근대는 무슨 차이인가? 근대화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간단한 강의를 들을수 있었다.
위에 대한 내용이 끝나고 나에게 의미심장한 주제의 내용이 나왔다.

조선사회는 자체적인 힘으로 근대화를 했을수 있을까?
우리가 이전 고등학교의 근현대사 수업에서는 정조시대에 한국의 근대화의 씨앗을 찾을수 있다고 배웠다.
먼저 정조시기에는 서양의 부르주아라 부를수 있는 중인들이 가내수공업에서 부를 축적하였다. 또한 합리적인 생각을 가능하게 하는 실학이 대두되었다.
조선은 혼자의 힘으로 근대화가 가능했지만 일본이 조선의 근대화를 막았고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써 약탈당했다.
위 내용이 내가 고등학교때 배웠던 내용이다.

강의시간에는 조선의 근대화에 관한 2가지 견해가 나왔다. 내재적 발전론과 타율적 근대화론이다.
내재적 발전론은 조선이 조선의 힘만으로 근대화가 가능했을것 이라는 주장이다.
타율적 근대화론은 조선이 조선의 힘만드로는 근대화가 힘들었다 타 국가의 힘으로 근대화가 가능했다는 주장이다.

내재적 발전론은 이루 식민지 수탈론으로 발전하고 타율적 근대화론은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발전한다.
일제 시기를 평가하는 논점은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식민지 수탈론
일제는 한국을 공업국가로 발전할 생각이 없고 단지 일본의 본토를 위한 착취을 위한 식민지로써 이용을 했다는 주장이다. 위 주장이 내새우는 증거로는 당시 조선의 50%가 넘는 국토와 총 생산의 80%가 일본에 수탈되었다는 것이다.

식민지 근대화론
일제가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고 일제에 의해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는 입장
위들은 일제에 의해 단기간의 산업발전이 가능했다고 주장한다.(연 3.7% 성장률)

위 2중에 어떤것이 맞는 시각일까? 일본에 의해 한국의 근대화가 일어난것을까? 일제가 한국을 통치함으로 인해 일어난 사회적 갈등이 옳은 것일까?

누구도 위에 대해 명쾌한 답을 해줄까? 새로운 시각을 배움으로써 나는 일종의 학문적 충격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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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여름날
고대는 노예제도를 바탕으로 움직이는 경제 체제였다면 중세는 봉건제를 통해 움직이는 사회였다.
봉건제의 핵심은 장원에 있다.
장원은 상위 영주나 왕에게 땅의 권리를 받은 영주 또는 기사가 농노들에게 땅의 점유권을 부여하고 점유권을 받은 농노가 영주 또는 기사의 경재적인 부분을 책임지는 공동체이다.
장원은 영주의 직영지와 농노들이 경작하는 경작지 주민들의 마을 영주의 저주지와 산림 목초지, 방목지등으로 구성되었다.

영주(이하부터 장원의 주인인 영주와 기사를 영주로 명칭 통일)는 자기의 장원에 거주하는 농노들의 안전을 보장해주고 땅의 점유권을 준다.

농노는 자기가 거주하는 정원의 영주에게 노역과 부역 그리도 토지에서 생산된 곡물의 일정량을 납부하였다. 또한 영주 소유의 토지의 경작도 하였다. 장원의 방아간등은 영주의 소유물이였기 떄문에 사용시 일정 이용료를 영주에게 납부하여야 했다.

언듯 보면 농노는 노예와 비슷해 보이지만 노예는 자신의 소유권이 주인에게 있어서 주인의 의지대로 거대가 되었지만 농노는 소유권이 본인에게 있어서 영주의 뜻에 따라 맘대로 사고 팔수 없었다.
또한 농노는 토지에 귀속되어 있었다.

농노는 영주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아서 토지를 박탈당하지 않는다면 토지에 대한 임대권은 보장이 되었다. 농노가 죽으면 그 농노의 장자에게 토지의 임대권이 상속이 되며 장자는 영주에게 일정 돈을 납부하면 그 임대권을 받을수 있었다.

이후 농노들에도 계층이 나누어지기 시작하였다.
기본 농노들은 정규적인 노역과 영주가 원하는 일에 대해서 노역을 했는데 예농들은 정규적인 노역에만 동원되었다.(비정규적인 노역등은 거부할 권리가 있었다.) 이후 예농은 노역을 공물이나 돈으로 대체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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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여름날

왓치맨 (09-03-06)

일기 2009.03.07 02:34
왓치맨
감독 잭 스나이더 (2009 / 영국, 미국)
출연 말린 애커맨, 빌리 크루덥, 패트릭 윌슨, 제프리 딘 모건
상세보기

평가가 2개로 엇갈릴는 영화이다.

원작인 만화책(그래픽노블) 왓치맨을 정독한 사람이라면 만화책 느낄수 없던 부드러움을 느꼈을 것이다.(왓치맨은 장면 장면이 뚝뚝 끈어져 있는 그림으로 되어 있어서 스토리를 보는샘 치고 참고 읽었지만 그림은 정말 정이 안붙는 책이였다.)
18세 이상으로 된 만큼 영상이 잔인하고 사실적이였다.
보통의 여성들이 좋아할만한 영화는 결코 아니다. 공개된 포스터랑 홍보 쪽지를 보면 가볍게 볼 수 있는 영화처럼 나와있지만 왠만한 소설만큼 고민하게 하는 머리아픈 영화이다.

원작을 보고서 영화를 봐서 만족도가 올라서 10점 만점에 9점(만점이 안되는 이유는 스토리 전개가 원작이랑 거의 같아서 보면서도 마지막까지 설마 원작이랑 결론이 같겠어? 조금은 다르겠지 하다가  어라... 같네 = _=;; 이래서 마이너스 1점)

시간때우기나 데이트 할겸 해서 여자랑 왓치맨을 보는 남자가 있다면 상대방의 호감도 -20은 보장하는 영화입니다.

덧. (스포일러가 있을수도 있어요.)

원작을 3번 이상 정독했는데 여자 주인공의 생부가 코미디언이라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
원작보다 여자 주인공의 성격이 좀더 어른스럽다고 할까?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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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여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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